미하일 플레트네프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 (2024.06.27)

  플레트네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 가 아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는 그의 피아니즘을 사랑하고 또 높이 사지만 그가 57년생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량이 급격히 노쇠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리사이틀 너무 좋았지만 동시에 굉장히 미스도 많아서 올해 라피협 전곡을 한다고 했을 때 이걸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많았다. 뭐 유튜브로 최근 라피협을 봐서 대략 어떻게 칠지는 예상이 되었다마는.. 그래도 그에 대한 나 혼자만의 의리로다가 결제를 하였으나 당일 너무 피곤해서 또 이걸 가 말아 하고 잠깐 고민을 하였네요. 게다가 이 날 너무 길이 막혔어 대체 서초에서 몇 분을 서있었던거야악. 너무 배고프고 너무 예민한 상태로 도착해서 본의 아니게 동생에게 개신경질을 내버리고 유야무야 사과도 하고 어찌저찌 들어가서 착석.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다들 플옹이 어떻게 칠 줄 알고 오신 것일까나. 이분은 이거 어디까지 작아지는 거예요? 싶은 피아니시시시모의 달인이셔서 오케를 뿌수고 나올 생각이 전혀 없으실텐데요.

이렇게 맘대로 치시는데 적장자라니 ㅠㅠ

  지휘자는 작년 일본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을 했을 때 지휘를 했던 사람이니 데려왔을 것이고 사실 오케와 지휘자에는 큰 기대가 없다 그저 플옹의 피아노를 잘 받쳐줄 수 있길 바랄 뿐. 그래도 전반적으로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는데 피아노가 전혀 포르티시모 하지 않고 오케 뒤에 슬며시 숨어버리시니까 대신 소리 높여 노래해 주는 오케의 의리를 모른 체 할 수는 없던 것이다. 물론 얘들아 이거 들리니 더 작게 해주련 하던 플옹의 바람을 따라주지 못한 슬픈 관들이 있었지만.. 1번은 내가 잘 모르는 곡이고 곡의 완성도도 조금 어설프니까 뭐 딱히 코멘트할 것은 없지만 역시 플옹의 사운드는 명불허전이라 하겠다. 특히 그의 모든 느린 곡들과 2악장은 기가 막힌데 늘 쓰는 시게루 카와이 피아노가 주는 물먹은 듯한 촉촉하며 차가운 음색이 나를 금방이라도 그립고 슬픈 상념 속으로 던져놓는 것 같다. 이 날의 베스트인 파가니니 광시곡은 사실 내가 들은 버전들 중 가장 좋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아니 사운드 메이킹을 어떻게 이렇게 하는 건지 피아노 알못인 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경지로, 오케스트라에 있는 악기들의 소리와 주법들을 피아노로 그대로 재현해 내는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유명한 18번 바리에이션은 말해 뭐 해. 열없는 태도로 등받이에 기대앉아 완전히 릴랙스한 상태에서 남은 기력을 오직 손가락에만 모은 채로 연주하는 그는 흡사 피아노의 도인 같고 그의 손에서 피어나는 음들은 성에가 반짝이며 앉은 가련한 들꽃과 같으니 (얼쑤). 인터미션 후의 라피협 2번은 갑자기 앉자마자 냅다 치기 시작하셔서 나도 당황 오케도 당황 지휘자도 당황한 까닭에 앙상블이 몹시 무너졌고 아 이 1악장은 역시 그 특유의 그랜드한 느낌을 살려야 좋구나 이제 그는 그런 걸 할 수 없어.. 되어 또 그의 노쇠함을 한탄하였던 바. 그래도 2악장부터는 모두 정신줄을 잡고 아름다운 아다지오를 들려주었다.

인터미션 중 열일하시던 조율사분

  앵콜은 차이코프스키의 녹턴 op.19 no.4. 사실 이 날 최고의 곡은 이 앵콜이었죠. 어떻게 단 몇 음 만으로 나를 단번에 슬픈 사랑의 끝을 예감한 차가운 새벽녘 상트 페쩨르부르크의 적막한 광장으로 데려가버리는 것인지. 지난번 리사이틀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눈물이 고여 흘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는 상트 페쩨르부르크에 가 본 적도 없다는 것이 그의 위대함이라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