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 리사이틀 (2024.06.17)

  윤찬 군을 처음 본 것은 2020년, 지금은 첼리스트 양성원 씨로 바뀌었지만 꽤 오래 평창 대관령 음악제의 음악감독이었던 손열음과 함께 했던 투 피아노 공연이었다. 그때 그는 아직 소년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수줍음이 많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등장하면 으레 하는 인사를 너무 하는 듯 마는 듯해서 뭐지..? 하고 황당해하고 있는데 프로그램 북에 17세라고 쓰여있길래 헉 애기가 무대에서 머쓱해서 그랬구나 하고 납득했던 기억. 그 날의 프로그램은 멘델스존 한 여름밤의 꿈과 프로코피에프 교향곡 1번 클래시컬을 투 피아노로 편곡한 버전으로 아직도 그 공연은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다. 페이지 터너를 따로 두지 않아 본인이 직접 악보를 넘겨야 했는데 손열음이 익숙한 듯 착착 넘기는 것과 달리 윤찬 군은 처음엔 좀 넘기다가 뭐 다 외웠기도 하고 넘기는 게 귀찮기도 했는지 나중엔 안 넘기고 연주에 집중하는 모습이 웃기고 기특했음. 그리고 이 날 둘의 연주 스타일도 꽤 대조적이었던 게 손열음은 스마트하고 시원시원하게 치면서 전체적으로 장악해 나가는 느낌이라면 윤찬 군은 아무래도 맞춰가면서도 순간순간 훅 하고 깊게 몰입해 버리는 게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과 여자 문과 남자 같은 인상이라 해야 하나. 그나저나 이땐 깎아놓은 밤알처럼 이쁘고 말끔했었는데..

  아무튼 이 공연 보고 아 얘 잘되겠네 어디서 1등 하겠네 생각하긴 했는데 계속 이름을 못 외워서 임 뭐시기, 그 어린 남자애, 인사 이상하게 하던 애, 뭐 이런 돼먹지 못한 호칭으로 부르며 엄마한테 걔는 요즘 뭐 한대 하고 묻기를 2년, 그는 2022년 반클라이번 콩쿨 우승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어 제가 절대 이름을 까먹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반클 콩쿨 때 영상에선 제법 인사도 잘하게 되었더라 기특해라.

  콩쿨 우승 이후 있었던 리사이틀을 가고 싶었는데 개 빡쎈 티켓팅으로 장렬히 실패. 리스트 두 개의 전설이랑 단테 소나타를 듣고 싶었는데.. 이번 리사이틀은 전국 각지에서 8회 정도 하니 그래도 내 자리 하나쯤은 있겠지 했지만 어림도 없지 구하기 너무 어려웠다 진짜. 아니 근데 이럴 일인가? 한국에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나 많았다면 한국 클래식 음악 시장의 미래가 참 밝을 텐데 말이에요. 서해선이 뚫린 덕분에 마음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져 버린 부천 아트센터는 홀도 그리 크지 않아 소리도 잘 들리고 음향도 썩 괜찮다. 부천을 구할 수 있다면 예당은 걸러도 좋아. 공연장에 티켓 구한다고 피켓 들고 있는 사람들 있다더니 진짜 봐서 좀 신기하기도.

웬만하면 팜플렛 표지 놓고 안찍는데 힘들게 온 기념으로

부아센의 스타인웨이는 다닐 리사이틀때도 느꼈지만 맑다기보단 또랑또랑한 느낌. 근데 같은 피아노가 아니라면 머쓱..

  사실 한 피아니스트가 모든 작곡가의 모든 곡을 다 잘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 저마다의 장기가 있고 영혼의 결이 맞는 곡이 있는 법. 그런 점에서 1부는 다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부분 부분 좋은 해석이 있긴 했지만 멘델스존의 무언가와 차이코프스키 사계는 서정적인 노래들이라 음색에서 먹고 들어가야 하고 캐릭터도 다양하게 잡아야 좋게 들리는데 임군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모든 노래를 너무 정직하게 한 목소리로 노래하니까 나중엔 음악이 좀 지루하게 들리게 된다. 게다가 6월쯤인가에서 우리 구역 어셔가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해 약간 집중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연은 중단되지 않았지만.. 쓰러진 그분은 무사하다고.  
  그러나 2부의 전람회의 그림 호로비츠 버전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테크닉 좋은 것도 알고 있었고 리듬 과격할 정도로 잘 타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타건이 좋은 걸 넘어서 이 정도의 포르테가 피아노 한 대로 가능하다니. 이거 어디까지 커지는 거예요? 지금 피아노로 오케사운드 내시는 거예요? 맨 처음 프롬나드 앉자마자 후루룩 쳐버린 것이나 병아리의 발레에서 누가 기침 하니까 그거 물끄러미 듣고 난 다음에 이어 치던 것도 귀엽고 웃겼으나 사실 전반적으로 웃을 수 없는 경악의 입틀막 상태. 이 곡을 연주하는 게 너무 즐거운 나머지 약간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피아노의 신과 접신한 것 같았다고나 할까. 마지막 키예프의 대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인데 혼신의 힘을 다한 포르테로 이 곡의 뻐렁침을 200% 전달해 주어 눈물이 고여버렸다. 아니 이렇게 온 마음과 사랑을 다해 목청이 터질 듯 피아노를 뚜까 패는 데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임군.. 피아노를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것입니까..

동생이 자꾸 애완용 도마뱀 닮았다고.. (부정할 순 없다)

  거의 전원이 기립을 했는데 앵콜 시작하니까 무슨 바람에 풀이 눕듯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에 착석하는 모습이 웃겼다. 첫 번째 곡은 1부 감상이랑 비슷했고 두 번째 곡 리스트 사랑의 꿈은 참 좋았다. 자주 치는 곡이라 그런지 해석이 완전히 본인의 것이 된 느낌. 플레트네프 버전의 리베스트라움을 참 좋아하는데 그건 인생 살만큼 산 아저씨가 꿈결 같은 사랑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쓸쓸함과 아련함이 있다면 임군의 연주는 지금 막 애틋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소년의 슬픔과 벅차오름이 있달까. 어떤 해석이든 참 아름다운 노래랄지. 아무튼 윤찬 군의 연주는 꼭 한 번은 실연으로 들어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무한대의 포르테로 당신을 반드시 뻐렁치게 만들어 드릴 거에요.